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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예지몽이야기(55)
시종일몽(始終一夢)

조선시대 알성시(謁聖試)는 임금이 문묘 참배를 위해 성균관(조선 최고 교육기관)을 방문할 때,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비정기 과거시험으로, 시험결과가 당일날 발표된다. 세종 즉위 16년(1434) 봄, 성균관 문묘에서 공자(孔子) 신위에 참배하는 공식행사를 마친 세종 임금은 알성시(謁聖試)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던 세종이 잠깐 잠이 들고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용 한 마리가 성균관 서편 정자 바로 옆에 있는 잣나무를 감고 있었다. 꿈에서 깬 세종이 이상하다 여겨, 수행원을 시켜 조심스럽게 살펴보라고 지시한다. 수행원이 성균관 서편 정자를 살펴보니, 한 선비가 행탁(行槖, 여행경비나 옷가지 등을 넣는 자루)을 베고 잣나무 아래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잣나무에 ..

조선 중종 즉위 8년(1513), 의정부의 일개 관노였던 정막개(鄭莫介)는 공신 박영문과 신윤무가 역모를 모의한다고 고발한다. 중종 임금은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그에게 많은 상을 주고, 상호군(上護軍, 정 3품 당하관)에 제수해, 천민(관노)에서 양반으로 신분도 상승된다. 또한 역모죄를 지은 박영문의 재산을 모두 정막개에게 주었다. 박영문과 신윤무가 중종의 이복동생인 영산군(寧山君)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은 당했지만, 정작 다른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며, 유일한 증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들었다는 정막개의 증언뿐이었다. 그러나 국문이 시작되고. 박영문과 신윤무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을 하여, 반역죄로 몰려 처형된다. 그들이 정국공신이자 판서까지 오른 인물이였음에도 일개 관노의 말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두었다. 태조의 8명의 아들 중, 첫째 부인 신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왕권에 대한 열망이 큰 인물이였다.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이복동생 방석, 방번을 제거하고, 2차 왕자의 난(1400)으로 동복형 방간을 유배 보낸 후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태종 임금이다. 태종 임금은 이처럼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므로, 자신이 차지한 왕권의 안정과 정통성을 외교적으로 확인받기 위해, 즉위하고 바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한 상태였다. (고명(誥命)은 '조선의 왕으로..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그의 나이 40세(1635)에 갑자기 간택 후궁으로 "숙의(淑儀, 종 2품)"를 뽑으라고 명령한다. 당황한 예조의 신하들이 그다음 날 다시 물어본다 “숙의 단자(淑儀單子)는 몇 살부터 몇 살까지 받아들입니까?” 인조는 답한다.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를 한정으로 하라.” 이틀 후, 인조의 할아버지인 선조와 그 왕비 의인왕후의 묘(목릉과 혜릉)가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하들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 인조가 후궁 간택을 중지시킬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나 한 달 조금 지난 후 인조는 재차 간택 날자를 재촉한다. “숙의(淑儀) 될 처녀를 간택하는 날짜를 다음 달 보름 뒤로 택해서 정하라.” 결국 삼간택을 걸쳐 인조는 장유(張留)의 딸을 선택한다. 그녀가 숙의(淑儀) ..

조선 13대 임금 명종은 11세(1545)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당시 명종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 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어머니 문정왕후는 자신이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3세에 명종을 낳은 것 때문이었는지, 아들의 후사에 대해 걱정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자신의 아들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명종이 14세(1548) 때 간택후궁 2명을 뽑는다. 그리고 3년 후(1551) 간택 후궁들 사이에서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며, 다시 간택후궁 1명을 더 들이도록 명을 내린다. 그때 명종의 나이 17세, 며느리 인순왕후의 나이 19세였다. 다행히 그해(1551)에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의 사이에서 손자인 순회세자가 태어난다. ..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되는 시기의 문관으로 19세(1357)인 고려 공민왕 때 과거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조선 태조 때 그의 나이 64세(1402)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성석린이 40세(1378) 되던 해, 대규모 왜구들이 고려의 수도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진군해 왔다, 왜구는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개성시 개풍군)까지 침입하였는데, 당시 문관이었던 그는 조전원수 (助戰元帥, 우두머리 장수를 돕던 장수)로 임명되어 양백연(楊伯淵,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장수)의 부하로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성석린이 왜병과 전투 중이던 어느 날 깜박 졸았는데, 그때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잘 모르는 사람이 성석린에게 다가와서는 “공은 쑥갓을 머리에 쓸 것이니, 근..

이중열(李中悅, 1518-154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을사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선조 때 복위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중종(조선 11대 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인종(조선 12대 왕, 장경왕후의 아들)이 9개월 만에 죽자, 이복동생 명종(조선 13대 왕,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척인 윤임(대윤(大尹))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선비들이 유배되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중열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이며, 호는 과재(果齋)이다. 병조판서였던 아버지 이윤경(李潤慶)과 어머니 신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5세(1543)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교육관청)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로서 900여수의 시조를 남긴 인물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시조도 남구만의 작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나니 숙종조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구만은 59세(1688)에 숙종의 후궁 장희빈을 비판한 죄로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갔다가, 6개월 후 유배가 풀렸다. 남구만은 60세(1689)되던 해 음력 4월 18일에, 다시 다른 빌미를 잡혀 강원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장희빈이 아들(후일 경종_조선 20대 왕)을 낳아 권력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구만이 강원도 유배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다. 남구만이 유배 가는 도중..

기건(奇虔, 1390~1460)은 조선 문관으로 청백리 중 한 명이다. 청백리(淸白吏)는 조선시대 청렴한 관직자에게 주어진 명칭으로, 그 인물이 사망한 후 엄격한 평가과정을 거쳐 의정부(조선 최고 행정기관)에서 수여했다. 일종의 관리 표창제도다. (기건도 그가 사망한 이후 세조 때 청백리로 지정되었다) 세종임금이 기건을 제주목사로 임명할 당시(1443), 제주는 한양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낙후되고, 왜구(일본해적)의 노략질도 심해서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관리 중에 과오가 있거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문관 출신의 평판이 좋은 기건이 제주목사로 임명되자 주변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다고 한다. 기건은 약 3년간(1443~1445) 제주목사로 있었는데, 그가 제주목사로 ..

조선 11대 왕 중종은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내고(1506, 중종반정)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반정공신 중 대다수는 기득권세력인 훈구파였는데, 그들은 왕권(중종)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세를 키우며 더욱 강해졌다. 중종은 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로 인해 부담을 느낀 중종은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사림파에게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의 계략으로 조광조 등의 사림파 관료들이 숙청되는데, 이것이 기묘사화(1519)의 개요다. 당시 관직에 있던 사림파 김안국(金安國, 1478~1543)과 김정국(金正國, 1485~1541) 형제도 조광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