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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사(史)적인 꿈 이야기(10)
시종일몽(始終一夢)

조선 3번째 임금 태종 이방원은 2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배다른 형제를 죽이거나, 친형제를 유배 보내기도 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임금에 오른 인물이다.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 태조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으며, 왕위찬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이런 오점을 안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당시 10살인 맏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1404)한다. 그리고 세자 전문교육기관인 경승부(敬承府)도 설치하고 특급 교육을 시작하며, 세자에 대한 큰 기대를 갖는다. 적장자인 양녕대군이 자신의 뒤를 이어 성군이 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오점을 지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공부에는 뜻이 없고, 일탈과 비행을 밥먹듯이 하며, 아버지 태종의 속을 썩이다가 결국 폐세자가 된다. 후대 선조실록의 기록( ..

한글을 비롯하여 과학, 예술, 문화,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 업적이 참으로 크다 보니 우리는 세종임금 대신 '세종대왕'이라고 부른다. 제목 그대로 세종대왕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예지몽을 꾸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세종대왕도 예지몽을 꾼다고 직접 말씀하셨다. 예지몽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이 꿈을 통해 미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해몽하여 길흉을 짐작해 보고, 화복을 점치기도 하는데, 이를 점몽(占夢)이라고 한다. 이 점몽이 딱 들어맞을 때면 예지몽의 신묘함에 크게 놀라게 된다. 세종께서도 이런 예지몽의 경험을 하셨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79권_세종 19년 10월 18일 기록에 의하면 세종이 40세 때 신하들과 경연(經筵)에 참석할 때 일이..

조선 세종 때 문신 강희(姜曦)는 강릉판관(江陵判官), 수 지평(守持平), 이조정랑(吏曹正郞)의 벼슬을 한 사람이다. 강희(姜曦)의 본래 이름은 강여옥(姜汝玉)이었다. 세종 14년(1432) 실시된 식년 생원시험 초시(한성시)에 합격한 강여옥은 자신의 답안지 외에 다른 1인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 밝혀져 사헌부의 조사를 받게 된다. 그가 대신 작성하여 제출한 답안지는 자신의 친척 형인 권약로(權約老)의 답안지로, 놀랍게도 권약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강여옥은 의(疑, 의심할 의), 의(義, 옳을 의) 각각 두 편을 지어서, 하나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하나는 권약로의 이름으로 제출했다. '그는 왜 죽은 사람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여 제출한 것일까?' 사헌부 조사관들도 무척 궁금했다. 조..

조선시대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공무원시험처럼 과거시험을 치러야 했다. 정기적인 과거시험인 '식년시'는 3년마다 열렸는데,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 3단계 시험과정을 거쳐 선발했다. 그중 복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치러진 초시합격생 240명이, 수도인 한양에 모여 재시험을 보고, 그중 33명의 최종 합격자를 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다. 복시 합격자 33명은 임금이 주재하는 전시 시험을 다시 쳐야 하지만, 전시는 합격여부가 아니라 33명의 순위를 가려 그 등수에 따른 벼슬을 주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시에 합격하면 사실상 과거에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조선 세종5년 계묘년(1423) 식년 문과(文科) 과거시험에서, 복시에 합격하고도 꿈 때문에 전시를 보지..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공신이 된 이무(李茂, 1355-1409)는 이방원이 즉위하여 임금이 되자 우정승에 오르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우정승 이무 (李茂 )가 권세가로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 그를 익히 알고 있던 정인수(鄭仁壽)라는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우정승 이무는 임금이 되어 있었다. 이무는 임금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화려한 깃발, 부채, 양산, 무기 모양의 장물 등의 의장(儀仗)을 잘 갖추고, 자신의 집에서 나와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시내(市內)를 지나갔다. 꿈에서 깬 정인수는 꿈이 신기하게 생각되어, 자신의 꿈 이야기를 같은 마을에 사는 한용이라는 지인에게 말하였다. 꿈이야기를 다 들은 한용은 "왕위(王位)를 바꿀 길한 꿈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즉위초에, 옛 고려의 왕족인 왕씨(王氏)가 역모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왕씨 중 왕위에 가까운 직계후손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섬 2곳에 강제 이주시켜 감시했다. 태조가 즉위한 지 3년(1394)되던 해, 태조 이성계는, 왕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어이 왕씨 숙청을 시작한다. 대상은 왕위에 가까운 직계 남자 후손들이었다. 먼저 음력 4월 15일에 윤방경 등에 의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모조리 수장시키고, 음력 4월 17일 정남진 등을 시켜 삼척으로 귀양 온 공양왕(고려 마지막 왕)과 그의 두 아들을 교살한다. 음력 4월 20일 손흥종 등에 의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수장시킨다. 그리고 당일 중앙과 지방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조선을 개국했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수도에서 새 왕조를 시작해야 한다는 열망 때문에, 즉위년부터 천도(遷都, 수도를 옮김)를 위해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때 주목받은 유력한 후보지가 충청도 계룡산 아래 신도안 일대다. 즉위 2년(1393) 봄.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물망에 오른 수도 후보지인 계룡산 일대를 답사하고는 바로 새 수도로 결정한다. 그리고 신수도 건설을 감독할 신하들을 남겨두어, 수도가 될 신도시 기초공사를 즉시 시작하게 한다. 약 한 달 후 계룡산 신수도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 총 81개 행정구역도 확정된다. 그런데, 계룡산 공사시작 10개월이 지난 1393년 음력 12웕 11일, 돌연 계룡산 신수도 공사가 중단된..

인현왕후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두 번째 왕비다. 당시 법도상 숙종은 왕비 사망 후 3년상을 마친 후 재혼이 가능했지만,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사망한 지 고작 7개월 만에 두 번째 왕비를 맞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주도권 쥔 서인정권이 서인쪽 왕비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인현왕후를 내정해 놓고 숙종의 재혼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왕비가 된 인현왕후는 초반부터 숙종임금의 애정을 받지 못했고, 숙종은 궁인 장옥정(후일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고 심하게 총애한다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은 후궁 장옥정를 견제하기 위해 간택후궁 영빈 김 씨(입궁한 해 귀인(종1품)으로 책봉)를 입궐시키기도 하고, 상소를 올려 후궁 장옥정을 폐출할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폐출 상소를 ..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권력을 행사했던 신돈(辛旽,?-1371)은 승려 출신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시절,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매골승이었는데, 승단 내에서는 낮은 출신의 승려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아주 높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절의 노비출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승려들이 기피하는 매골승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천한 일개 승려였던 신돈은 어떻게 공민왕의 신임을 받기 시작한 것일까? 신돈과 공민왕의 인연은 공민왕이 꾼 꿈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열려실기술에 따르면, 어느 날 공민왕이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공민왕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타나서, 공민왕을 겨냥하여 칼을 빼어 들었다. 칼로 공민왕을 막 찌르려는 일..
유탁(柳濯, 1311∼1371)은 고려말 지략과 무예를 갖춘 용맹한 장군으로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전투마다 큰 공을 세워 시중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의 장례문제와 영전(影殿)축조에 반대했던 일 때문에 공민왕과 반목하다가, 결국 헌사(憲司)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그의 나이 61세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 제111권-열전 제24' 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꿈에서 유탁이 벼슬청탁을 하여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어느날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고려 장군 유탁이 태조 이성계를 찾아와서는 자신의 아들 유습에게 벼슬을 내려주기를 정중하게 청하였다. 태조는 꿈을 깬 후 자신이 꾼 꿈을 기이하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