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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몽(始終一夢)
조선 태조 이성계는 즉위초에, 옛 고려의 왕족인 왕씨(王氏)가 역모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왕씨 중 왕위에 가까운 직계후손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섬 2곳에 강제 이주시켜 감시했다. 태조가 즉위한 지 3년(1394)되던 해, 태조 이성계는, 왕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어이 왕씨 숙청을 시작한다. 대상은 왕위에 가까운 직계 남자 후손들이었다. 먼저 음력 4월 15일에 윤방경 등에 의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모조리 수장시키고, 음력 4월 17일 정남진 등을 시켜 삼척으로 귀양 온 공양왕(고려 마지막 왕)과 그의 두 아들을 교살한다. 음력 4월 20일 손흥종 등에 의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수장시킨다. 그리고 당일 중앙과 지방에..
조선 중종 즉위 8년(1513), 의정부의 일개 관노였던 정막개(鄭莫介)는 공신 박영문과 신윤무가 역모를 모의한다고 고발한다. 중종 임금은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그에게 많은 상을 주고, 상호군(上護軍, 정 3품 당하관)에 제수해, 천민(관노)에서 양반으로 신분도 상승된다. 또한 역모죄를 지은 박영문의 재산을 모두 정막개에게 주었다. 박영문과 신윤무가 중종의 이복동생인 영산군(寧山君)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은 당했지만, 정작 다른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며, 유일한 증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들었다는 정막개의 증언뿐이었다. 그러나 국문이 시작되고. 박영문과 신윤무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을 하여, 반역죄로 몰려 처형된다. 그들이 정국공신이자 판서까지 오른 인물이였음에도 일개 관노의 말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조선을 개국했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수도에서 새 왕조를 시작해야 한다는 열망 때문에, 즉위년부터 천도(遷都, 수도를 옮김)를 위해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때 주목받은 유력한 후보지가 충청도 계룡산 아래 신도안 일대다. 즉위 2년(1393) 봄.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물망에 오른 수도 후보지인 계룡산 일대를 답사하고는 바로 새 수도로 결정한다. 그리고 신수도 건설을 감독할 신하들을 남겨두어, 수도가 될 신도시 기초공사를 즉시 시작하게 한다. 약 한 달 후 계룡산 신수도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 총 81개 행정구역도 확정된다. 그런데, 계룡산 공사시작 10개월이 지난 1393년 음력 12웕 11일, 돌연 계룡산 신수도 공사가 중단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두었다. 태조의 8명의 아들 중, 첫째 부인 신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왕권에 대한 열망이 큰 인물이였다.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이복동생 방석, 방번을 제거하고, 2차 왕자의 난(1400)으로 동복형 방간을 유배 보낸 후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태종 임금이다. 태종 임금은 이처럼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므로, 자신이 차지한 왕권의 안정과 정통성을 외교적으로 확인받기 위해, 즉위하고 바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한 상태였다. (고명(誥命)은 '조선의 왕으로..
인현왕후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두 번째 왕비다. 당시 법도상 숙종은 왕비 사망 후 3년상을 마친 후 재혼이 가능했지만,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사망한 지 고작 7개월 만에 두 번째 왕비를 맞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주도권 쥔 서인정권이 서인쪽 왕비를 만들기 위해, 미리 인현왕후를 내정해 놓고 숙종의 재혼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왕비가 된 인현왕후는 초반부터 숙종임금의 애정을 받지 못했고, 숙종은 궁인 장옥정(후일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고 심하게 총애한다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은 후궁 장옥정를 견제하기 위해 간택후궁 영빈 김 씨(입궁한 해 귀인(종1품)으로 책봉)를 입궐시키기도 하고, 상소를 올려 후궁 장옥정을 폐출할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폐출 상소를 ..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권력을 행사했던 신돈(辛旽,?-1371)은 승려 출신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시절,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매골승이었는데, 승단 내에서는 낮은 출신의 승려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아주 높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절의 노비출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승려들이 기피하는 매골승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천한 일개 승려였던 신돈은 어떻게 공민왕의 신임을 받기 시작한 것일까? 신돈과 공민왕의 인연은 공민왕이 꾼 꿈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열려실기술에 따르면, 어느 날 공민왕이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공민왕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타나서, 공민왕을 겨냥하여 칼을 빼어 들었다. 칼로 공민왕을 막 찌르려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