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꿈을 믿고 역모를 고한 관노 정막개 본문

예지몽이야기

꿈을 믿고 역모를 고한 관노 정막개

Hari k 2024. 1. 24.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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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즉위 8년(1513), 의정부의 일개 관노였던  정막개(鄭莫介)는 공신 박영문과 신윤무가 역모를 모의한다고 고발한다. 
중종 임금은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그에게 많은 상을 주고, 상호군(上護軍, 정 3품 당하관)에 제수해, 천민(관노)에서 양반으로 신분도 상승된다. 또한 역모죄를 지은 박영문의 재산을 모두 정막개에게 주었다.

박영문과 신윤무가 중종의 이복동생인 영산군(寧山君)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은 당했지만, 정작 다른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며, 유일한 증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들었다는 정막개의 증언뿐이었다.

그러나 국문이 시작되고. 박영문과 신윤무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을 하여, 반역죄로 몰려 처형된다.

그들이 정국공신이자 판서까지 오른 인물이였음에도 일개 관노의 말만 믿고, 바로 극형으로 처단한 것에 대해, 당시 사건을 기록하던 사관( )은 '박영문과 신윤무가 여러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관노 정막개의 고발에 대해 '전연 터무니없는 것을 꾸미고 거의 다 억지로 말을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일개 관노였던 정막개는 무엇을 믿고 두사람을 역모로 고발한 것일까? 사안이 큰 만큼, 잘못되면 본인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선 정막개 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정막개는 박영문과 신윤무의 구사(丘史, 조선시대 임금이 종친이나 공신에게 내려주던 관노비)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을 출입하는 것이 아주 익숙했다. 

박영문(전 공조판서)과 신윤무(전 병조판서)는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정국공신으로 판서 벼슬까지 올랐지만, 본래 욕심이 많고 선비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결국 대간(관리들을 감찰하는 관직)의 탄핵으로 파직된 후, 권세를 쥐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어느 날 박영문이 신윤무의 집에 가서 조정을 원망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신윤무의 집을 우연히 방문한 정막개가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게 된다.

정막개는 몹시 교활하고 간사한 자였지만, 언변에 매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몰래 들었던 박영문과 신윤무의 대화를 잘 가공하여, 그들이 해명하지 못하게 대역죄를 꾸미려고 며칠 동안 밤낮으로 꾀하던 중에 꿈 하나를 꾸게 된다.

꿈속에서 정막개의 몸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수레위에 앉아 형장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반역모반죄를 지은 대역죄인은 주로 성문 안에 있는 군기감(병기제조청) 앞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고, 반역모반이 아닌 다른 대역죄는 서소문밖에 있는 처형장에서 집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레가 군기감(軍器監) 앞에 이르러 멈추고, 정막개가 수레에서 내려서 막 형 집행받으려고 할 즈음에, 갑자기 준마(駿馬, 빠르게 잘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게 된다.


말에 올라 탄 정막개는 자신의 움직임이나 태도가 아주 의젓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호위하고 따르는 모습 또한 몹시 성대하였다 

정막개는 꿈을 깬 후, '이 꿈은 내게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고변을 결심하고 고발하였다. 

후에 대신들이 역모를 알고도 바로 고발하지 않고 늦게 고발한 죄를 물어, 정막개의 직책과 상을 회수하도록 중종임금에게 건의했지만 중중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정막개에게 하사한 당상관이 사용하는 가마만 회수하였을 뿐이다.

정막개는 역모를 고발하고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았으나. 상을 받은 지 1년 만에 거의 탕진하여 이전처럼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며, 그의 행동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주변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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