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꿈에서 유배지를 미리 본 조선 문신 이중열 본문

예지몽이야기

꿈에서 유배지를 미리 본 조선 문신 이중열

Hari k 2023. 12. 6.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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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열(李中悅, 1518-154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을사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선조 때 복위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중종(조선 11대 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인종(조선 12대 왕, 장경왕후의 아들)이 9개월 만에 죽자, 이복동생 명종(조선 13대 왕,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척인 윤임(대윤(大尹))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선비들이 유배되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조선 문신 이중열 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이중열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이며, 호는 과재(果齋)이다. 병조판서였던 아버지 이윤경(李潤慶)과 어머니 신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5세(1543)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교육관청)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해 봄에 너무나 상세하고 선명한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큰 고개 3개를 넘어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그 마을에서 잠을 자기 위해 집 한 채를 빌렸는데, 벚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이었다. 

 

이 집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길 "내가 주인이요. 나는 광릉(廣陵) 사람 이수장(李壽長)이라 하오. 나의 증조부가 갑자사화(연산군이 자신의 생모 폐비 윤 씨의 일을 보복하기 위해 저지른 숙청사건)를 피해 이리로 들어와 살면서 관가 퇴기(退妓)에게 장가 들어서 아들을 낳고, 이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소"라고 대답하였다. 


광릉은 광주 이 씨의 시조묘가 있는 곳으로 집주인 이수창의 본관이 자신과 같은 광주(廣州) 이(李)씨였다.
이중열은 집주인 이수창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집 주변을 둘러보다가 꿈에서 깨었다.

이중열은 마치 직접 가서 본 듯 꿈을 깨고도 생시같이 오랫동안 기억이 났다. 꿈이 너무 이상하여 동생들(이숙열, 이계열)에게 이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꿈이 무슨 뜻일까 물어보기까지 한다. 꿈 이야기를 들은 동생들은 “형님이 먼 지방으로 부임할 징조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다음 해(1544) 음력 11월에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이중열은 27세(1545)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조 정랑은 인사권을 가진 벼슬이었는데, 이때 윤원형의 먼 친척 윤춘년(尹春年)을 북쪽 지방의 우관(郵官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외직)으로 좌천시키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윤춘년이 그에게 앙심을 갖게 된다.

이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게 되고, 27세(1545)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다. 

28세(1546)되는 해 가을에 죄를 물어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가 귀양지인 함경도 갑산(甲山)에 도착해서 보니 산천과 도로가 3년 전 생시 같았던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당시에는 짚으로 지붕을 덮는 초가집이 일반적이었는데, 갑산의 집들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이 많았다. 갑산의 남문 밖으로 귀양살이할 집을 정했는데, 꿈에서 본 벚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이었다. 집주인 이름이 이수장(李壽長)이라는 사람으로 광릉군(廣陵君, 광주 이 씨 일파)의 후손으로 그 조상 때에 피난 와서 첩을 얻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니 그 사실도 꿈에 보던 것과 꼭 같았다. 그는 꿈에서 미리 본 곳이 자신의 유배지임을 알고 매우 놀랐다 

이중열은 귀양지에 도착한 지 얼마 후에 사약을 받아 죽게 되는데, 과거 이중열이 이조 정랑시절 인사문제로 앙심을 품었던 윤춘년이 시국이 바뀌자, 명종임금의 외숙인 윤원형에게 이중열을 무고한 것이다. 결국 탄핵을 받고 사약(死藥)을 받게 되다. 이중열이 갑산(甲山)의 유배지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나이 29세(1547)되던 해 음력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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