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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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이야기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간 꿈속의 조언

Hari k 2023. 11. 1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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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1대 왕 중종은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몰아내고(1506, 중종반정)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반정공신 중 대다수는 기득권세력인 훈구파였는데, 그들은 왕권(중종)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세를 키우며 더욱 강해졌다.

중종은 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로 인해 부담을 느낀 중종은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사림파에게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의 계략으로 조광조 등의 사림파 관료들이 숙청되는데, 이것이 기묘사화(1519)의 개요다.

 

조선_김정국_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당시 관직에 있던 사림파 김안국(金安國, 1478~1543)과 김정국(金正國, 1485~1541) 형제도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의 핵심인물이었으므로, 유배나 죽임 등의 큰 변고를 겪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변고를 겪지 않고 파직하여 낙향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후부터 다시 복직되기 전까지 형 안국은 경기도 이천에서, 동생 정국은 경기도 고양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게 된다. )

후대 사람들은 형제가 조광조와는 달리 급진적인 중앙정치의 개혁이 아닌, 점진적인 향촌사회의 교화에 주력했기 때문에 변고를 피해 갔다고 한다. 또는 당시에 정치적인 처신을 잘하여 살아남았다고도 한다.

기묘사화 당시 형 김안국은 41세(1519)로 전라도 관찰사였고, 동생 김안국은 34세(1519)로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 

 

기묘사화가 시작될 때 동생 김정국은 위기상황을 겪은 일이 있는데, 그가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의 일이다.
그해(1519) 조광조 등이 탄핵받자, 동생 김정국이 급하게 조광조의 충심( )과 결백에 관한 글을 적어 상소를 지었다.(그 상소의 글자가 수천 자에 종이가 10장이나 되었다고 한다) 
 
마침 측근 중에 임금에게 공물을 바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 한양으로 출발하므로, 그에게 자신이 쓴 상소문을 주며, “자네가 한양에 가서 이 상소를 올려 주게” 하고 부탁하였다. 

상소문을 부탁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밤에 김정국이 꿈을 꾼다.
꿈에 신인(神人=신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김정국에게 다가와 말했다. “만일 그대가 이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면 많은 사림들이 어육(魚肉)을 당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뒤쫓아 보내서 다시 찾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국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었고, 바로 사람을 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 상소를 도로 찾아오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 일이 소문으로 궁궐까지 전해지고, 김정국이 탄핵을 받게 되어, 중종이 기묘사화의 주동자인 예조판서 남곤의 생각을 묻는다.


남곤은 "스스로 그 상소가 그르다는 것을 알고 도로 스스로 가져갔으니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해 김정국은 2년 후 파직된다.

훗날 형인 김안국이 항상 동생 김정국에게 말하기를, “만약 그때 그 상소가 임금에게 올라갔다면, 우리 형제는 당연히 죽었을 것이고,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라고 하며 그때를 회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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