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꿈 때문에 죽음을 예감한 조선 무관 송희미 본문

예지몽이야기

꿈 때문에 죽음을 예감한 조선 무관 송희미

Hari k 2023. 11. 13.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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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미(宋希美, 13??~1437)는 본래 일개 군사였으나 태종(세종의 아버지) 때 무관으로 발탁되어 세종 때 절제사(2품)의 위치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대 임금이었던 세종이 출신과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였기 때문이다. (송희미는 활을 아주 잘 쏘았다고 한다)

조선_무관_죽음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송희미는 세종 13년(1431)에 함경도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로 부임하여, 세종 18년(1436)에 파직될 때까지 내내 북방을 지켰다. (오랫동안 변방을 지킨 송희미가 기특하여 세종은 재위 17년(1435)에 종 2품 상계(上階) 품계인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켜 준다)

송희미가 함경도 경원에서 절제사로 근무할 때, 그의 수발을 드는 수청기생이 하나 있었다 
세종 18년(1436) 9월 어느 날, 그 수청기생이 송희미의 아침 수발을 들면서 걱정스럽게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였다.  

“소인이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갑자기 적이 나타나서 영감에게 달려오더니, 영감의 목을 찍어 죽이고는, 머리를 칼로 베어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송희미는 기생의 꿈이 꺼림칙하고 불안했다. 그리고 기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있어서, 여진족이 경원성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오 온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덜컥 겁이 난 송희미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부하  우안덕(牛安德) 등이 '적의 형세가 매우 적으니, 나가서 싸워 백성들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두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성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명확한 군법위반이었다.

그사이 여진족은 경원성을 포위하고, 이틀 동안이나 마음껏 노략질을 하며 백성들을 잡아갔다. 이 딱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던 한 군졸은 성을 넘어 성밖으로 나가, 잡혀가는 백성 몇 십 명을 혼자서 구해 돌아오기도 했다. 이때 여진족에게 잡혀간 백성의 수만 어림잡아 150여 명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송희미는 자신이 성문을 잠그고 적과 맞서 싸우지 않은 것과, 150여 명의 백성이 잡혀간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이 또한 군법위반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크게 격노하며  송희미를 파직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리고 그 죄를 물어 세종 19년(1437.3.17.)에 독약(毒藥)을 내려 자결(自決)하게 했다.

후대 일부 사람들은 그가 꿈을 너무 맹신하여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자초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묵묵히 변방을 지키던 무관 송희미는 수청기생이 자신이 죽는 꿈을 꾼 후, 약 6개월 후에 정말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재위기간 중 조사(朝士, 조정에서 벼슬을 한 신하) 가운데 죄를 지어도 사형을 받은 사람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죄를 물어 사사당한 사람은 송희미 단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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