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광해군이 꾼 아들에 관한 꿈 본문

예지몽이야기

광해군이 꾼 아들에 관한 꿈

Hari k 2023. 11. 10. 22:33
반응형

조선 15대 왕 광해군(1575~1641)은 부인 왕비 류 씨와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3자녀는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후일 세자가 된 아들 이지(李祬, 1598~1623)만 남게 된다.

 

광해군도 이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후궁을 많이 두어 아들을 많이 낳아 왕실이 번창하기를 원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광해군이 직접 처녀 간택을 통해 후궁 선발을 하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는데, 간택령이 내려진 시기는 각각 그의 나이 35세(1610), 40세(1615)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33세(1608)에 즉위하고, 48세에 인조반정(1623)으로 폐위되고,  66세(1641)에 사망할 때까지, 후궁 첩지를 받은 9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아들은 탄생하지 않는다.

조선_광해군_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연려실기술 제23권 기록에 의하면, 광해가 아들과 관련된 꿈을 꾸고, 더 이상 아들탄생에 대한 소망을 접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광해군이 중년에 꿈을 꾸었는데,  비단 도포를 입은 대관이 하늘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임금이 남의 아들을 많이 죽였으니 임금은 한 아들도 보전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많은 아들을 원하느냐.”라고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본래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와 후궁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적자(嫡子=정실이 낳은 아들)도 아니고 장자(長子=맏아들)도 아니었다. 따라서 아버지 선조가 54세(1606)에 얻은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과 친형 임해군 등은 정권을 장악하는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즉위 후 무리한 숙청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옥사로 인해 수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꿈속에서 들은 "남의 아들을 많이 죽였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꿈을 꾼 후부터 광해군은 단산(斷産=아이를 낳지 않다)을 하기 위해 부적과 주문을 쓰기까지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광해 때의 어떤 궁인이 늙은 후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때는 왕의 승은을 입어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적과 주문을 미워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녀가 없는 것은 하늘이 복을 준 것이다"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그의 아내 왕비 류 씨, 그의 아들 세자 이지는 폐위되었으며, 후궁들도 유배되거나 자결하거나 죽임 당하였다.

또한 유일한 아들 폐세자 이지(李祬)와 며느리 박 씨가 위리안치(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울타리 안에 가둠) 된 유배지(강화도)에서 탈출하다 실패한 후 목을 매 자결하게 된다. 폐세자 이지의 나이  25세였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폐비 류 씨도 유배지에서 상심하다가 아들이 죽은 지 4개월 만에 죽게 된다.

결국 광해군의 유일한 혈육은 후궁 귀인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가 있었는데, 광해군이 44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5살 때  아버지 광해군이 폐위되고 어머니 귀인 윤 씨는 인조반정 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외삼촌의 집에서 자라다가 후일 인조가 불러 음성 박씨 박징원과 혼인하게 했다. 후일 인조가 논밭과 노비를 옹주에게 주어 외손들이 광해군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