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태몽 본문

태몽이야기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태몽

Hari k 2018. 3. 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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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근대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사회주의 운동이력과 박헌영같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해 활동한 점 등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재평가를 거쳐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됨으로써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받게 된다. 

  또한 해방 이후 이념 대립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평화통일을 추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간 중도정치인' 또는 '한국 진보정치의 기원'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몽양 여운형 태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여운형은 아버지 여정현(呂鼎鉉)과 어머니 경주 이씨사이에서 2남 2녀 중 맏아들로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이다.

 

여운형의 태몽은 그의 어머니 이씨가 꾸었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꿈을 꾸었는데

눈앞에서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태양 태몽을 꾼 이후 그가 태어났는데, 후일 그의 호가 '몽양(夢陽)'이 된 것도 그의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양반이었지만 동학사상을 따르던 할아버지 여규신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평등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21세(1906년)에 할아버지와는 반대로 계급주의를 신봉했던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여운형은 33세(1918년)부터 신한청년당을 창당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일본 도쿄에서 일본인 및 세계 각국의 기자 앞에서 일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독립의 정당성을 연설하기도 한다.

 

또한 항일운동 중 일본 경찰에게 잡혀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복역 후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아 언론을 통한 국내 항일운동에 매진했으나, 일본의 탄압으로 신문은 곧 폐간된다.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이 증폭되고, 남쪽에서는 미국, 북쪽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남북 분단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막기 위해 그의 나이 61세(1946년 7월)에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군정과 협상하고 김일성을 만나 설득하는 등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후에도, 다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려 하지만, 그의 나이 62세인 1947년 7월 19일 서울 종로 혜화동에서 괴한이 쏜 총탄을 맞고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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