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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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이야기

폭군 궁예의 태몽

Hari k 2018. 1. 1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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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궁예, 857~918)는 태봉(후고구려)을 세운 인물이다.  집권 초기에는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며 민심을 많이 얻었지만, 집권 후반기에 갈수록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이라는 신통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악명 높은 폭군으로 알려졌다.

  궁예는 본래 신라 진골출신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기록이 거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경문왕일 것이라 추정되며, 어머니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후궁이나 궁녀일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 태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궁예의 탄생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857년경 5월 5일 외가집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태몽은 누가 꾸었는지 모르지만,

지붕에서 하얀 무지개가 나와 하늘 위로 뻗치는 꿈이였다고 한다.   

 

본래 무지개꿈은 아주 좋은 일이 생기는 행운의 꿈이지만, 하얀 무지개가 등장하는 태몽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왕이 일관(日, 당시 천문 담당자)에게 사주풀이와 해몽을 부탁하였다.  일관은 궁예가 장성하면 나라에 큰 해를 끼칠 인물이므로 키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왕과 집안 왕족들이 이를 믿고 아이를 죽이라고 명하게 된다.

 

궁예는 평생 한쪽눈이 실명된 상태로 살았는데,

궁예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자가 아이를 죽이려고 높은 다락에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아래로 던졌는데, 마침 아이의 유모가 아이를 받아 안아 목숨은 건졌지만,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그때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몰래 키워졌으며, 유모를 통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면서 잠시 세달사(世達寺)에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는 스님이 되었으나, 일관의 태몽 해석처럼 반 신라적인 세력과 뜻을 같이하다가 세력을 키운 후 왕건(王建) 등과 함께 송악에 후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이후 국호를 마진(摩震, 904년)과 태봉(泰封, 911년)으로 바꾸게 된다.  이후 궁예의 악행에 반기를 든 왕건을 피해 도망가다가 백성들의 손에 의해 918년 죽임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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