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선생과 태몽 본문

태몽이야기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선생과 태몽

Hari k 2017. 8. 29.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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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1876-1949)는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이지만 '민족의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호 ‘백범’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호를 백범(白凡)이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 태몽_시종일몽(始終一夢)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나 차별과 가난을 헤쳐가야 했던 김구는 후일 자신이 쓴 '백범일지'에서 자신의 태몽이 밤송이꿈이라고 어머니가 항상 말씀해 주셨다고 적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김구를 잉태하고 꿈을 꾸었는데
푸른 밤송이를 헤집어 속에 들어있는 크고 붉은 밤 한개를 얻어서 감추어 두는 꿈을 꾸었다.

이후 산달이 되어 7일간의 진통끝에 어렵게 얻은 아이가 김구였다.


황해도 해주에는 아이 아버지가 소의 길마(수레를 끌기 위해 소에 얹는 안장)를 등에 얹고 지붕에 올라가 소의 울음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들은 아내가 소처럼 힘을 내서 아이를 순산한다는 민간요법이 있는데, 김구도 이렇게 하고 태어났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친척 어른이 양반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관직에 나아가 천한 신분을 벗어나려 하였으나 과거에 낙방한다. 이후 아버지가 준  관상학과 풍수지리 책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관상학을 공부할수록 자신의 관상이 너무 복이 없음을 알고 실망하던 차에 '관상이 좋은 것은 건강함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이 건강한 것보다 마음이 좋은 것이 더 좋다(身好不如心好) '라는 글귀를 읽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동학운동, 의병활동, 치하포의거, 파옥, 승려생활, 신민회 활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김구의 어릴적 이름은 '창암(昌巖)'이였는데, 1893년 18세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창수(昌洙)'로 개명하게 되고, 1898년 23세에 탈옥 후 마곡사에서 승려로 생활하며 '원종(圓宗)'이란 법명 사용하였으며, 1900년 25세에 지인 유완무의 권유로 '구(龜)'로 개명하였다가, 1914년 39세에 인천교도소 수감된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九)로 개명하였다.
이처럼 김구는 여러번 개명을 하였는데, 그의 개명의 역사만 보아도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알 수 있다.

 

김구는 '열강에 의해 나라가 나뉘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분명히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후는 더욱 통일이 어려우니 그러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전에 후세에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친일파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 한다.
이런 김구를 곱게 보지 않던 무리들이 6.25 사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암살하게 되는데, 당시 김구의 나이 74세였다.

 

후대 사람들은 김구의 태몽이 위인 치고는 너무 평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본래 밤을 보호하여 성장하게 도와주는 밤송이는 덜 익었을 때 초록색이었다가 밤이 익으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덜 익은 밤송이처럼 우리 민족을 보호해 줄 수 없는 까칠한 시대에 끊임없는 절망 속에서도 탱글탱글 여문 밤알처럼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김구의 삶은 태몽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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