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몽(始終一夢)

서애 유성룡과 예지몽 본문

예지몽이야기

서애 유성룡과 예지몽

Hari k 2017. 8. 13.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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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의 자리에서 이순신, 권률 등을 천거하고 국난을 극복하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는 등 그 공이 큰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과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꿈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서애 유성룡(조선) 예지몽_시종일몽(始終一夢)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5개월전인 신묘년(1591년) 겨울에 유성룡은 우연히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그가 입궐할 때마다 왕래하는 경복궁 연추문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연추문(延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대궐로 들어갈 때 주로 관료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다.  유성룡은 너무 놀라고 당혹스러워 불에 탄 연추문 아래를 이리저리 살피고 배회하며 그 자리를 못 뜨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유성룡에게 다가와서 “이 궁궐은 처음 자리를 정할 때 지나치게 아래로 내려갔으니, 지금 만약 고쳐 짓는다면 당연히 약간 높은 산 쪽에 가깝게 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요”라고 말을 하였다
그 사람의 말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었지만, 자신의 꿈을 불길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꿈이라도 '임금이 사는 궁의 문이 불탔다'는 불경스러운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을 꾼 그 다음해인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고, 선조는 왜적을 피해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한양에는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이 있었는데, 왜란에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사방에서 왜적이 창궐하고 임금마저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마당에 모두들 희망을 잃고 나라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그제서야 주변 지인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 주고는 “그때 꿈속에서 이미 경복궁을 고쳐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이는 곧 나라가 회복될 징조이므로, 왜적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라고 하며 미래를 예견하였다. 결국 왜적은 패하여 물러가고, 선조는 피난을 떠난 지 1년 만에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일과 관련하여 유성룡은 이후 자신이 꾼 꿈에 대한 기록인 '몽조(夢兆)’라는 글을 남겼고, 그의 셋째 아들인 유진이 서애집(西厓集)에 함께 묶어 간행하였다.
유성룡은 예지몽에 대해 '꿈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원래 신기하고 기묘하여 어떤 일이 생길 조짐을 먼저 알게 된다. 나는 살면서 꿈을 꾼 것이 많이 들어 맞았다. 몸소 겪은 것들은 반 이상이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를 포함한 후대 왕들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을 불길하다고 여겨 아무도 재건하려 하지 않았다. 폐허로 있던 경복궁은 그 후 270년 후인 1868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지어져 지금의 경복궁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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